Sample · Love Book
흐린 날도 같이 기다려줘서
필름 카메라에서 시작된 도윤과 하린의 시간
도윤 & 하린 · 사진 동아리에서 만난 부부 · 샘플 속 인물과 이야기는 예시를 위해 만든 가상의 기록입니다. · PDF로 받기
이 책의 바탕이 된 답변 16개
2016년 봄, 대학교 사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하린이 필름 카메라를 들고 혼자 구석에 앉아 있었고, 도윤이 그 카메라 기종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도윤은 하린이 말할 때 손으로 렌즈 돌리는 버릇이 귀여웠다. 하린은 도윤이 사람보다 사진 속 빛 이야기를 더 신나게 하는 게 신기했다.
2017년 겨울, 동아리 출사로 간 강릉 안목해변. 해 뜨는 걸 찍겠다고 새벽 다섯 시에 나갔는데 구름이 껴서 해는 끝내 안 보였다. 대신 둘이서 편의점 컵라면을 먹으며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했다.
하린이 첫 회사에서 힘들어 매일 울던 2020년. 도윤은 퇴근 후 매일 하린 회사 앞까지 가서 같이 걸었다. 아무 말 안 하고 걷기만 한 날이 더 많았다.
둘 다 계획 세우는 걸 싫어하고, 여행 가면 지도 대신 골목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 둘 다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쓴다.
도윤은 느긋하고 하린은 급하다. 하린 덕분에 도윤은 마감을 지키게 되었고, 도윤 덕분에 하린은 쉬는 법을 배웠다.
2021년 하린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에서 도윤이 사흘 내내 하린 곁을 지켰다. 하린은 그때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둘이 모은 돈으로 망원동에 작은 전셋집을 얻은 날. 빈 방 바닥에 앉아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주말마다 동네 사진관 같은 공간을 열어 이웃들 사진을 찍어주는 것. 아이가 생기면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
도윤이 하린에게: '네가 찍은 사진 속 세상이 제일 따뜻해.' 하린이 도윤에게: '흐린 날도 같이 기다려줘서 고마워.'
도윤은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사진에 빠져 있었고, 하린은 디자인과 1학년으로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외로웠다.
출사 일정 때문에 단체방에서만 이야기하다가, 하린이 도윤이 올린 사진에 처음으로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이 사진 무슨 필름이에요?'
연남동 경의선숲길. 도윤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하린을 세워두고 30분 동안 셔터를 못 눌렀다. 너무 긴장해서였다.
2018년 3월, 동아리 전시회가 끝난 날 밤. 도윤이 전시장 불을 끄기 전에 '다음 전시는 우리 둘 사진으로 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하린은 도윤을 '곰'이라고 부른다. 겨울에 늘 두꺼운 갈색 패딩을 입고 다녀서. 도윤은 하린을 '찰칵이'라고 부른다.
2019년 여름 제주 종달리. 렌터카도 없이 버스로만 다니다가 막차를 놓쳐서 바닷가 민박에 묵었다. 그날 밤 별이 너무 많아서 둘 다 사진 찍는 걸 잊었다.
차례
- 복학한 도윤과 서울 생활의 하린
- 구석의 필름 카메라
- 이 사진 무슨 필름이에요?
- 30분 동안 눌리지 않은 셔터
- 구름 낀 안목해변과 전시장 불
- 종달리의 막차와 별
- 아무 말 없이 회사 앞을 걷던 해
- 사흘의 곁과 빈 방 바닥
프롤로그
2017년 겨울, 강릉 안목해변의 새벽 다섯 시는 어두웠다. 도윤과 하린은 해 뜨는 장면을 찍겠다고 밖으로 나갔지만, 구름은 끝내 걷히지 않았다. 카메라가 기다리던 빛은 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편의점 컵라면을 앞에 두고 앉았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동안 말이 길어졌다. 보이지 않은 해 대신, 처음으로 오래 이어진 이야기가 그 겨울의 사진처럼 남았다.
1. 복학한 도윤과 서울 생활의 하린
도윤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학생의 시간을 맞추었다. 복학한 뒤 도윤의 시선은 자주 사진으로 향했다. 하루의 틈마다 사진을 생각했고, 눈앞의 장면을 그냥 지나치기보다 붙잡아 두고 싶어 했다. 군 복무 뒤의 생활은 낯설게 다시 시작되었지만, 사진은 도윤에게 오래 바라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하린은 디자인과 1학년으로 서울 생활을 배워 가고 있었다. 처음 맞는 생활은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하린은 그 시간 속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새로워야 할 것들이 때로는 멀게 느껴졌고, 적응해야 한다는 마음이 하루를 조용히 누르기도 했다.
도윤은 복학한 자리에서 사진에 깊이 들어가고 있었고, 하린은 서울이라는 생활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아직 서로에게 닿지 않았지만, 각자의 하루는 이미 조금씩 방향을 만들고 있었다. 도윤은 사진을 바라보며 머물렀고, 하린은 낯선 생활을 견디며 천천히 익숙해져 갔다.
2. 구석의 필름 카메라
하린은 필름 카메라를 두 손에 가까이 둔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2016년 봄, 대학교 사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 자리였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한데 섞이는 동안에도 하린의 손은 카메라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처음 들어선 자리에서 하린은 혼자 앉아 있었고, 필름 카메라는 그 곁에 놓인 가장 분명한 물건이었다.
도윤은 그 카메라를 먼저 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오던 시선이 하린의 손에 들린 기종에 머물렀다. 도윤은 카메라를 알아본 사람처럼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처음의 말은 하린이라는 사람보다, 하린이 들고 있던 필름 카메라에서 시작되었다.
하린은 말을 하면서 손으로 렌즈를 돌리는 버릇이 있었다. 손끝이 렌즈 둘레를 따라 움직였고, 말은 그 움직임에 맞춰 조금씩 이어졌다. 도윤은 그 버릇을 눈여겨보았다. 크게 드러나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도윤에게는 귀엽게 남았다.
도윤이 말을 이어갈 때에는 사람보다 사진 속 빛 이야기에 더 신이 났다. 하린은 그 점이 신기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도윤은 사람을 앞세워 분위기를 띄우기보다, 사진 안에 있는 빛을 이야기할 때 더 또렷해졌다. 하린은 그런 도윤의 말투를 따라 듣다가, 카메라를 든 손을 다시 렌즈 쪽으로 가져갔다.
환영회 자리는 계속 흘러갔고, 두 사람은 그 많은 말들 사이에서 카메라와 빛에 기대어 서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도윤에게 하린은 구석에 혼자 앉아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으로 남았다. 하린에게 도윤은 카메라 기종을 알아보고 다가와, 사진 속 빛 이야기에 들뜬 사람으로 남았다. 그 봄의 처음은 큰 사건처럼 번지지 않고, 렌즈를 돌리는 손끝과 빛을 말하는 목소리 사이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3. 이 사진 무슨 필름이에요?
하린은 단체방에 올라온 출사 일정을 따라 읽다가, 도윤이 올린 사진 앞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의 말은 단체방 안에만 있었다. 출사에 관한 말이 오갔고, 필요한 이야기는 여러 사람 사이에 놓였다. 하린은 그 사진을 보고 처음으로 단체방 밖의 창을 열었다.
도윤에게 도착한 개인 메시지는 짧았다. “이 사진 무슨 필름이에요?” 하린은 사진에 대해 묻는 방식으로 도윤에게 말을 건넸다. 질문은 가볍게 보였지만, 단체방에서만 이어지던 거리를 조용히 바꾸었다.
도윤은 하린의 이름으로 온 메시지를 보았다. 출사 일정 때문에 오가던 말과 달리, 그 문장은 도윤에게만 와 있었다. 사진과 필름이라는 익숙한 말이었지만, 개인 메시지라는 형식이 두 사람 사이에 새로 생겼다. 단체방의 흐름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처음으로 따로 놓였다.
4. 30분 동안 눌리지 않은 셔터
하린은 연남동 경의선숲길에 서 있었다. 도윤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들었지만, 손끝은 셔터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하린을 세워둔 채 도윤은 화면을 바라보고, 다시 카메라를 조금 고쳐 잡았다.
도윤에게는 그 시간이 길었다. 찍어주겠다고 먼저 말했는데도, 막상 하린을 렌즈 앞에 두자 셔터 하나가 쉽게 눌리지 않았다. 너무 긴장해서였다. 30분 동안 도윤은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서 있었지만, 사진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하린은 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첫 데이트의 경의선숲길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말보다 긴 멈춤이 놓였다. 도윤의 카메라는 준비된 채였고, 셔터는 끝내 늦게까지 눌리지 않았다.
5. 구름 낀 안목해변과 전시장 불
새벽 다섯 시, 도윤과 하린은 해 뜨는 장면을 찍겠다고 강릉 안목해변으로 나갔다. 2017년 겨울의 바다는 아직 어두웠고, 두 사람은 동아리 출사로 온 시간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기다렸다. 렌즈가 향한 쪽에는 해가 떠올라야 했지만, 구름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다림은 길어졌고, 해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
도윤은 해가 보이지 않는 하늘을 향해 더 찍을 수 있는 장면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출사는 처음 바라던 사진을 남기지 못한 채 흐려졌다. 하린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새벽부터 나와 기다린 시간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구름 낀 안목해변에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기대한 빛이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해 뜨는 장면 대신 편의점 컵라면을 앞에 두고 앉았다. 출사에서 찍으려던 것은 바뀌었지만, 그 자리에 남은 시간은 비어 있지 않았다. 컵라면을 먹는 동안 도윤과 하린은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했다. 이전까지는 사진과 일정 사이에 머물던 말들이, 그날은 조금 더 길게 이어졌다.
하린에게 그 새벽은 해를 보지 못한 날로만 남지 않았다. 구름 때문에 놓친 장면보다, 도윤과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한 시간이 더 또렷해졌다. 컵라면은 특별한 음식이 아니었지만, 기다림이 끝난 뒤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붙들어 둔 것이었다. 하린은 해가 없는 해변에서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18년 3월, 동아리 전시회가 끝난 날 밤이 왔다. 도윤은 전시장 불을 끄기 전에 멈춰 섰다. 하루의 전시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꺼야 할 불이 남아 있었다. 그 순간 도윤은 하린에게 '다음 전시는 우리 둘 사진으로 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하린은 그 말을 전시장 불이 꺼지기 직전의 시간 속에서 들었다. 도윤의 말은 사귀자는 말로 하린에게 닿았다. 안목해변에서 해를 기다리다 놓친 장면과, 전시회가 끝난 밤에 남은 불빛은 서로 다른 계절에 있었다. 도윤은 불을 끄기 전 그 말을 남겼고, 하린은 두 사람의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그 밤 앞에 서 있었다.
6. 종달리의 막차와 별
버스가 떠난 뒤, 종달리의 길에는 두 사람이 남았다. 2019년 여름 제주에서 도윤과 하린은 렌터카 없이 버스로만 다녔고, 그날도 버스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막차를 놓친 뒤에는 더 갈 방법을 찾기보다, 바닷가 민박에 묵기로 했다.
하린은 낯선 곳에서 하루가 예정과 다르게 접히는 순간을 오래 바라보았다. 렌터카가 없다는 사실은 불편함이었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두 사람은 서두르지 못했다. 버스가 오고 가는 시간에 맞추어 걷고 멈추는 동안, 여행은 계획보다 느린 모양이 되었다.
도윤은 바닷가 민박에 들어선 뒤에도 카메라를 먼저 떠올렸을 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별이 너무 많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히 바빴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로 밀려났다.
두 사람은 별을 오래 보았다. 남겨야 할 장면 앞에서 아무것도 누르지 않은 밤이었다. 카메라는 조용히 있었고, 종달리의 밤하늘만 두 사람의 눈앞에 가득했다.
7. 아무 말 없이 회사 앞을 걷던 해
도윤은 퇴근을 하고 하린의 회사 앞까지 갔다. 2020년, 하린은 첫 회사에서 힘들어 매일 울었다. 하루가 끝난 뒤에도 울음이 다 끝나지 않은 얼굴로 회사 앞에 서 있는 날이 있었다. 도윤은 그 앞에서 기다렸다가 하린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아무 말 안 하고 걷기만 한 날이 더 많았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어떤 말이 위로가 되는지 애써 고르기보다 도윤은 곁에 서서 걸었다. 하린은 대답할 힘이 없을 때도 발걸음만은 도윤 옆에 맞추었다.
하린에게 그 시절의 하루는 자주 급했다. 마음이 먼저 달려가고, 해야 할 일들이 뒤따라오는 날들이 이어졌다. 첫 회사라는 이름은 새로움보다 버거움으로 남았고, 퇴근 뒤에도 긴장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회사 앞에서 시작된 걷기는 하린이 하루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시간이 되었다.
도윤은 원래 느긋한 사람이었다. 서두르지 않는 성격은 때로 일을 늦게 붙잡게 만들었고, 마감을 끝까지 밀어두게도 했다. 하린은 급한 사람이었고, 해야 할 일을 제때 끝내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었다. 하린과 함께 지내며 도윤은 마감을 지키게 되었다.
하린도 도윤에게서 배운 것이 있었다. 느긋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멈춰 서도 괜찮다고 몸에 알려주는 일이었다. 도윤과 걷는 동안 하린은 울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힘든 하루를 바로 해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함께 걷는 일만으로도 저녁은 조금씩 다른 모양이 되었다.
그해의 회사 앞에는 긴 말보다 발소리가 더 자주 남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고, 하린은 급한 숨을 조금씩 고르며 길을 따라갔다. 도윤은 하린의 걸음이 빨라지면 함께 빨라지고, 느려지면 같이 느려졌다. 말이 없는 저녁에도 두 사람의 방향은 같은 쪽을 향해 있었다.
8. 사흘의 곁과 빈 방 바닥
하린은 장례식장에 앉아 오가는 발소리를 들었다. 2021년, 하린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였다. 도윤은 사흘 내내 하린 곁을 지켰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윤의 자리는 쉽게 비지 않았다.
하린에게 그 사흘은 긴 말보다 오래 남았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데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하린은 도윤의 곁에서 알았다. 도윤은 하린 대신 슬픔을 덜어낼 수 없었지만, 하린이 혼자 앉아 있게 두지 않았다. 하린은 그때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윤은 장례식장의 시간을 조용히 견뎠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두르기보다, 하린이 있는 쪽에 머물렀다. 하린의 슬픔을 재촉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밝은 말로 덮으려 하지도 않았다. 도윤에게 필요한 일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자리를 오래 지키는 일이었다.
사흘이 지나도 하린의 마음에 남은 것은 특별한 사건 하나가 아니었다. 하린 곁에 앉아 있던 도윤의 시간이 남았다. 빈틈을 채우려 하지 않고 빈틈 옆에 머문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린은 그 사흘을 지나며 도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을 마음속에 놓아 보았다.
2023년, 두 사람은 모은 돈으로 망원동에 작은 전셋집을 얻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방에는 두 사람이 가져온 시간보다 비어 있는 자리가 더 많았다. 가구가 놓이기 전의 바닥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두 사람은 그 빈 방 바닥에 앉아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도윤은 방을 둘러보며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공간을 보았다. 하린은 바닥에 앉아 음식을 먹는 순간이 이상하게 또렷하다고 느꼈다. 대단한 식탁도, 갖춰진 살림도 없었지만 두 사람이 같이 마련한 집이었다. 짜장면 그릇이 놓인 바닥 위로 작은 전셋집의 첫날이 조용히 시작되었다.
하린에게 그날은 뿌듯함이 크게 소리 내는 날이 아니었다. 오래 모은 돈이 집이라는 형태가 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닿은 장소가 망원동에 생겼다. 빈 방 바닥에 나란히 앉은 일이 하린에게는 충분히 큰 일이었다. 아직 채워야 할 것이 많다는 사실보다, 함께 들어왔다는 사실이 먼저였다.
도윤에게도 그 집은 완성된 장면보다 시작되는 장면에 가까웠다. 계획표처럼 정확히 나뉜 생활보다, 둘이 차근차근 놓아 갈 물건들과 날들이 떠올랐다. 도윤과 하린은 원래 계획 세우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행을 가도 지도 대신 골목을 따라 걷는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데 서툴렀지만, 골목에서 멈추는 일에는 익숙했다. 모퉁이를 돌아 무엇이 나오는지 모르는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불편하기보다 자연스러웠다. 길을 잃었다고 말하기보다, 아직 걷는 중이라고 느끼는 편에 가까웠다. 그런 마음이 작은 전셋집 안에서도 이어졌다.
두 사람은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썼다. 바로 확인되지 않는 사진을 기다리는 일은 두 사람의 속도와 잘 맞았다. 원하는 장면이 곧장 손에 잡히지 않아도, 남겨진 시간이 사진 안에 천천히 맺히는 방식을 좋아했다. 도윤과 하린은 서로의 시선이 닮아 있다는 것을 그런 순간마다 느꼈다.
하린은 도윤을 ‘곰’이라고 불렀다. 겨울에 늘 두꺼운 갈색 패딩을 입고 다녀서 생긴 애칭이었다. 도윤은 하린을 ‘찰칵이’라고 불렀다. 두 애칭은 거창한 약속보다 생활에 가까운 이름으로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도윤은 하린에게 “네가 찍은 사진 속 세상이 제일 따뜻해.”라고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말에는 하린이 바라보는 장면을 도윤이 어떻게 느끼는지가 담겨 있었다. 하린이 찍은 사진은 도윤에게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하린의 마음이 머무른 자리였다. 도윤은 그 따뜻함을 오래 보아 온 사람이었다.
하린은 도윤에게 “흐린 날도 같이 기다려줘서 고마워.”라고 남기고 싶어 했다. 하린에게 도윤은 맑아질 때만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앞이 흐린 시간에도 서두르지 않고 같이 머무는 사람이었다. 장례식장의 사흘과 빈 방 바닥의 하루가 그 말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주말마다 동네 사진관 같은 공간을 열고 싶어 했다. 이웃들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함께 꿈꾸었다. 사진을 직업이나 취미의 이름으로만 두지 않고,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남기는 일로 이어 가고 싶어 했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골목을 따라 걷던 마음이 동네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열리는 모습이었다.
아이 생기면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다. 해마다 같은 자리에 서면 달라진 얼굴과 자라난 시간이 함께 남을 것이다. 두 사람은 먼 계획을 빽빽하게 세우기보다, 같은 자리를 정해 오래 돌아오는 일을 상상했다. 사진은 지나간 해를 붙잡기보다, 다시 그 자리에 서게 하는 약속에 가까웠다.
망원동의 작은 전셋집에는 아직 채울 것이 많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먼저 빈 방 바닥에 앉아 한 끼를 먹었다. 골목을 따라 걷듯, 필름이 현상되기를 기다리듯, 두 사람의 생활도 서두르지 않고 놓이기 시작했다. 짜장면 그릇 옆에 필름 카메라가 있었다면, 그날의 빈 방도 오래 남을 사진이 되었을 것이다.
에필로그
망원동 작은 전셋집의 빈 방 바닥에서 짜장면을 먹던 날, 도윤과 하린은 아직 놓을 물건보다 함께 둘 마음이 더 많은 방에 앉아 있었다. 주말마다 동네 사진관 같은 공간을 열어 이웃들 사진을 찍어주고 싶다는 바람도, 아이가 생기면 매년 같은 자리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도 그 방 안에 조용히 놓였다.
도윤은 하린이 찍은 사진 속 세상이 제일 따뜻하다고 남겼고, 하린은 흐린 날도 같이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남겼다. 두 사람은 앞으로도 지도를 먼저 펼치기보다 골목을 따라 걸을 것이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두르는 마음과 쉬어 가는 마음을 나누며, 같은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시간을 천천히 쌓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