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 부모님 기록
새벽 네 시 부엌 불빛
제주 구좌읍 바닷가에서 망원시장까지 이어진 어머니 이순자의 시간
이순자 · 망원시장 반찬가게 30년, 딸이 씀 · 샘플 속 인물과 이야기는 예시를 위해 만든 가상의 기록입니다. · PDF로 받기
이 책의 바탕이 된 답변 16개
새벽 네 시, 부엌 불빛 아래에서 반찬을 담던 엄마의 뒷모습. 망원시장 반찬가게를 30년 하시는 동안 엄마는 늘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셨다.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셨다. 외할머니가 해녀셨고, 엄마도 열두 살 때부터 외할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우셨다고 한다.
외할머니. 엄마는 지금도 '우리 어멍은 숨을 참는 법이 아니라 숨을 쉬는 법을 가르쳐줬다'고 말씀하신다.
아빠가 아프시고 혼자 가게를 꾸리시던 1990년대. 새벽에 시장에 나가서 밤 열 시에 가게 문을 닫으셨다.
스물두 살에 서울로 올라오신 것. 바다만 보던 엄마가 처음 본 서울은 너무 시끄러웠다고 한다.
1996년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을 때.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엄마는 '바다에서 숨 참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아빠 병간호를 하면서도 가게 문을 하루도 닫지 않으셨다.
아빠와 우리 삼남매. 그리고 제주에 계신 외할머니. 엄마는 매년 외할머니 생신마다 꼭 제주에 내려가셨다.
내가 고3 때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가게 일로 지쳐 있으면서도 꼭 따뜻한 미역국을 데워주셨다. 미역은 늘 제주에서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것이었다.
'남의 집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내 새끼 먹이는 것처럼 만들어라.' 엄마가 가게 일을 도울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다.
열 살 무렵 처음 바다에 들어갔다가 너무 무서워서 울면서 나왔는데, 외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두드려주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신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으셨다.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까지만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공부만큼은 끝까지 시키겠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일하던 봉제공장 근처 국숫집에서 아빠를 만나셨다. 아빠가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국수를 시키고 엄마 쪽만 쳐다봤다고 한다.
1985년 망원시장 귀퉁이에 두 평짜리 반찬가게를 여셨다. 처음 만든 반찬은 제주식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이었다.
막내인 내가 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썼을 때. 엄마가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고 오셨다. 그 사진을 지금도 가게 벽에 걸어두셨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 우리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엄마가 하시던 말씀이다.
차례
-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
- 등을 두드려준 외할머니
-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마음
- 시끄러운 서울과 국숫집
- 망원시장 귀퉁이 두 평 가게
- 새벽 네 시 부엌 불빛
- 하루도 닫지 않은 문
- 미역국과 학사모
프롤로그
엄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새벽 네 시의 부엌 불빛이 생각난다. 아직 집 안이 조용한 시간, 엄마는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 반찬을 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은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망원시장 반찬가게를 30년 하는 동안 엄마의 하루는 늘 우리보다 이르게 시작되었다.
엄마의 시작은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이었다. 외할머니는 해녀였고, 엄마는 열두 살 때부터 외할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웠다고 한다. 열 살 무렵 처음 바다에 들어갔다가 너무 무서워 울면서 나왔고, 외할머니가 아무 말 없이 등을 두드려주셨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엄마가 지금도 말하는 외할머니의 가르침은 바다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스물두 살에 서울로 올라온 엄마에게 처음 본 서울은 너무 시끄러운 곳이었다고 한다. 바다만 보던 사람이 낯선 도시에서 일을 하고, 아빠를 만나고, 마침내 망원시장 귀퉁이에 두 평짜리 반찬가게를 열었다. 처음 만든 반찬은 제주식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이었다. 그 작은 가게에서 엄마는 남의 집 밥상에 오를 음식을 내 새끼 먹이듯 만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아빠가 아프셨던 1996년의 시간도 엄마의 삶에서 빠질 수 없다.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엄마는 병간호를 하면서도 가게 문을 하루도 닫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괜찮다, 다 지나간다.”고 말했고, 스스로에게는 바다에서 배운 숨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 책은 그 말들과 밥상과 새벽 불빛을 따라, 내가 곁에서 보고 전해 들은 엄마 이순자의 시간을 조심스럽게 엮은 기록이다.
1.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
엄마 이순자는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엄마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놓이게 되는 풍경도 그 말 안에 들어 있다.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 엄마의 시작은 그렇게 바다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외할머니는 해녀였다고 한다. 그 말은 짧지만, 그 안에는 물 가까이 살아야 했던 날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외할머니는 바다로 나가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 곁에서 자란 아이였다. 집과 바다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았을 엄마의 어린 시절을 나는 다 알지 못하지만, 엄마가 태어난 곳을 말할 때마다 바다가 함께 따라온다는 것은 안다.
엄마는 열두 살 때부터 외할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웠다고 한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 어른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때다. 그런데 엄마는 그때 이미 외할머니의 일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 일을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누가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 말만으로 어린 엄마의 하루가 가볍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시절의 엄마를 직접 본 적이 없다. 다만 엄마가 “열두 살 때부터”라고 말하는 순간, 그 나이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이였던 엄마가 외할머니를 따라나섰다는 사실은, 엄마의 어린 시절이 놀이와 배움만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엄마에게 바다는 바라보는 풍경이기보다, 일찍부터 배워야 했던 삶의 자리였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해녀였고, 엄마가 그 뒤를 따라 물질을 배웠다는 이야기는 우리 집에서 엄마의 시작을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문장처럼 남아 있다. 많은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 문장에는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의 공기가 묻어 있다. 엄마가 태어난 곳과 외할머니의 일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고, 엄마의 어린 몸도 그 곁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나는 그 사실을 들을 때마다 엄마를 지금의 모습으로만 볼 수 없게 된다.
열두 살의 엄마는 외할머니를 따라 바다 가까이 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물질을 배웠다는 말은, 엄마가 아주 이른 나이에 외할머니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외할머니가 먼저 걸어간 자리를 엄마가 따라갔고, 엄마는 그 일을 배우며 자랐다.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에서 시작된 엄마의 삶은 그렇게 외할머니의 곁에서 물과 맞닿아 있었다.
2. 등을 두드려준 외할머니
엄마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낼 때면, 자주 돌아가는 장면이 있다. 열 살 무렵, 처음 바다에 들어갔던 날의 이야기다. 엄마는 그때 바다가 너무 무서웠다고 했다. 결국 울면서 바다에서 나왔고, 그 곁에 외할머니가 있었다.
그 장면을 들을 때마다 나는 엄마의 어린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이 몸에 닿는 순간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지는 엄마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무서워 울면서 나왔다는 말만으로도, 그때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어린 엄마에게 바다는 넓고 낯선 곳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그때 아무 말 없이 엄마의 등을 두드려주셨다고 한다. 엄마가 이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이유는, 아마 그 손길이 오래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찾기보다, 먼저 등을 두드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어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외할머니의 침묵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이가 울며 나온 자리에서 꾸짖지도 않고, 설명하지도 않고, 그저 등을 두드려주는 일은 쉬운 듯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엄마는 그 손길을 통해 무서워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숨을 고를 시간을 얻었을 것이다.
엄마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외할머니였다. 엄마는 지금도 “우리 어멍은 숨을 참는 법이 아니라 숨을 쉬는 법을 가르쳐줬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에는 열 살 무렵의 바다와, 울면서 나온 아이의 등 위에 얹힌 손이 함께 들어 있다. 숨을 참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숨을 쉬며 지나가는 법을 엄마는 외할머니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엄마가 외할머니를 말할 때에는 단순한 그리움만 있는 것 같지 않다. 삶에서 어떤 사람은 말보다 몸짓으로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외할머니가 엄마의 등을 두드려주던 그 순간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 말 없는 손길이 엄마 안에 오래 남아, 지금까지도 엄마의 말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난다.
3.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마음
엄마에게도 젊은 시절의 꿈이 있었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셨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는 말은, 내가 엄마를 생각할 때 오래 마음에 남는 대목이다. 엄마가 그 꿈을 어떤 얼굴로 품었는지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집안 형편 때문에 중학교까지만 다니셨다. 더 배우고 싶어도 더 다닐 수 없는 시간이 엄마에게 있었다. 그 사실을 말할 때마다 나는 공부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열려 있는 길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엄마에게 학교는 다닌 곳이면서 동시에 더 머물고 싶었던 곳이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꿈과 중학교까지만 다녔다는 사정은 엄마의 삶 속에서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앞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마음을 멈추게 한 형편이었다. 엄마는 그 사이에서 오래 서 있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그 일을 향해 더 걸어갈 수 없었던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그래서 우리 공부만큼은 끝까지 시키겠다고 하셨다. 그 말에는 단순히 학교를 오래 다니라는 뜻만 있지 않았다. 당신이 멈추어야 했던 자리에서 자식들만큼은 멈추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엄마에게 우리의 공부는 자식의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엄마가 끝까지 놓지 못한 꿈의 다른 모양이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왜 공부에 마음을 두셨는지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배움은 지나간 기회였고, 동시에 자식에게는 꼭 지켜 주고 싶은 길이었다. 형편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일이 있었기에, 엄마는 우리 앞에 놓인 길만큼은 쉽게 접히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 바람은 말보다 오래 남아 집 안의 기준이 되었다.
엄마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는 말을 떠올리면, 나는 엄마가 우리에게 보였던 단단함을 다르게 보게 된다. 엄마는 자신의 꿈을 크게 내세우지 않았지만, 우리의 공부 앞에서는 물러서지 않으려 하셨다. 그것은 아쉬움에서 나온 고집이기도 했고, 사랑에서 나온 약속이기도 했다. 엄마가 하지 못한 공부가 우리에게는 끝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중학교까지만 다니셨다는 사실은 짧은 문장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들어 있다. 더 배우고 싶었던 마음,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접어야 했던 사정이 함께 들어 있다. 엄마는 그 시간을 지나와 우리에게 공부를 끝까지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의 지난 꿈이 조용히 우리 곁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았다.
4. 시끄러운 서울과 국숫집
엄마의 삶에서 큰 전환점은 스물두 살에 서울로 올라온 일이었다고 한다. 바다만 보며 살던 엄마에게 서울은 처음부터 낯선 곳이었다. 무엇보다 너무 시끄러웠다고 했다. 그 말 속에는 단순히 소리가 크다는 뜻만이 아니라, 익숙하던 바다의 넓은 숨과는 다른 생활의 속도가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엄마가 말한 그 시끄러운 서울을 자주 떠올린다. 바다만 보던 사람이 갑자기 사람과 일과 소리로 가득한 곳에 서게 되었을 때, 마음이 얼마나 오래 흔들렸을까 생각한다. 엄마는 그때의 이야기를 길게 꾸미지 않았다. 다만 서울이 너무 시끄러웠다고,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 서울에서 엄마는 아빠를 만났다. 장소는 봉제공장 근처 국숫집이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일하던 그 무렵, 엄마의 하루 가까이에 그 국숫집이 있었다. 국수 한 그릇이 오가던 자리에서 두 사람의 시간이 처음 겹쳤다.
아빠는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서 국수를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 쪽만 쳐다봤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말보다 반복이 먼저 떠오른다. 같은 시간, 같은 주문, 같은 시선이 하루하루 이어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또렷하다.
엄마가 그 시선을 처음부터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 답변 속에는 놀람도, 웃음도, 망설임도 자세히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아빠가 매일 같은 시간에 국숫집에 왔고, 국수를 시키고, 엄마 쪽만 쳐다봤다는 것만 남아 있다. 그 단순한 기억이 두 사람의 시작으로 전해졌다.
나는 그 장면을 크게 꾸미고 싶지 않다. 스물두 살의 엄마가 처음 마주한 서울은 시끄러웠고, 그 시끄러운 서울 한가운데에 국숫집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매일 같은 시간 찾아와 국수를 시키던 아빠가 있었다. 엄마 쪽을 바라보던 그 시선은 국숫집의 하루 속에 조용히 놓여 있었을 것이다.
5. 망원시장 귀퉁이 두 평 가게
1985년, 엄마는 망원시장 귀퉁이에 두 평짜리 반찬가게를 여셨다. 시장의 한쪽, 넓다고 할 수 없는 자리에서 엄마의 일이 시작되었다. 두 평이라는 말은 숫자로는 짧지만, 그 안에 놓였을 것들을 생각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반찬을 만들고, 담고, 팔고, 다시 준비하는 하루가 그 작은 가게 안에서 이어졌을 것이다.
처음 만든 반찬은 제주식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이었다. 엄마의 손에서 나온 첫 음식들이 그렇게 이름을 얻었다. 자리돔젓에는 엄마가 떠나온 제주가 조용히 배어 있었을 것이고, 멸치볶음에는 매일 밥상에 오를 반찬의 단단함이 있었을 것이다. 거창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는 자기 손으로 문을 연 첫 자리였다.
나는 그 가게를 떠올릴 때마다 먼저 크기를 생각하게 된다. 두 평짜리 가게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서로 닿을 만큼 좁았을 것이다. 반찬을 놓을 자리와 엄마가 서 있을 자리, 손님이 바라볼 자리 사이에 큰 간격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는 그 좁은 공간을 일터로 삼았고, 그 안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엄마는 가게 일을 도울 때마다 같은 말씀을 하셨다. “남의 집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내 새끼 먹이는 것처럼 만들어라.” 그 말은 꾸중처럼 들릴 때도 있었고, 당부처럼 들릴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날에도 뜻은 하나였다. 돈을 받고 파는 반찬이라 해도, 누군가의 밥상에 오르는 순간 그것은 함부로 만들 수 없는 음식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 말 속에는 엄마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들어 있다. 엄마에게 반찬은 물건이기 전에 밥이었다. 누군가의 집으로 건너가 그날의 끼니가 되고, 아이의 숟가락 위에 올라가고, 가족의 밥상 한쪽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남의 집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끝내 남처럼 만들지 말라고 했다.
처음의 반찬이 제주식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이었다는 사실도 오래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엄마의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고, 하나는 밥상에서 자주 만나는 반찬의 이름이다. 두 평 가게의 시작은 멀리 있는 기억과 가까운 끼니가 함께 놓인 모습 같았다. 엄마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맛으로, 사람들이 매일 먹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게 일을 도울 때마다 들었다는 그 말은, 단지 반찬가게에서만 쓰이는 말이 아니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견디고 손을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양을 늘리거나 모양을 좋게 하는 것보다 먼저, 먹는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이었다. 내 새끼 먹이는 것처럼 만들라는 말에는 허투루 하지 말라는 엄마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망원시장 귀퉁이의 두 평은 작았지만, 엄마의 기준은 작지 않았다. 처음 내놓은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에도 그 마음이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가 반찬 앞에서 얼마나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을지 생각한다. 남의 집 밥상이라는 말 앞에서 엄마의 손은 늘 한 번 더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시장 귀퉁이의 가게는 엄마가 살아온 길 위에 새로 놓인 작은 자리였다. 그곳에서 엄마는 제주식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을 만들며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곁에서 돕는 이에게, 음식이 어디로 가는지 잊지 말라고 말했다. “남의 집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내 새끼 먹이는 것처럼 만들어라.” 그 문장은 두 평짜리 가게 안에서 엄마의 손끝을 따라 오래 머물렀다.
6. 새벽 네 시 부엌 불빛
엄마의 삶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새벽 네 시가 온다. 하루가 아직 시작되기 전, 부엌에는 불빛이 켜져 있고 엄마는 그 아래 서 있었다. 나에게 그 시간은 잠의 깊은 자리였지만, 엄마에게는 이미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그 불빛 속에서 반찬을 담던 엄마의 뒷모습이 오래 남아 있다.
나는 엄마의 얼굴보다 그때의 등을 먼저 기억한다. 돌아보지 않고 앞에 놓인 반찬을 담던 모습, 몸을 낮추고 다시 세우며 손을 움직이던 모습이다. 말이 많지 않아도 그 장면에는 엄마의 하루가 들어 있었다. 새벽 네 시의 부엌은 조용했고, 그 조용함 속에서 엄마만 깨어 있었다.
망원시장 반찬가게를 30년 하시는 동안 엄마는 늘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셨다. 그 말은 단순히 아침을 일찍 시작했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눈을 뜨기 전 이미 엄마의 하루는 한참 앞으로 가 있었다. 집 안의 다른 시간보다 엄마의 시간이 먼저 움직였다.
어린 나는 그 사실을 매일 크게 생각하지 못했다. 부엌 불빛이 켜져 있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고, 엄마가 그 시간에 서 있는 것도 당연한 일처럼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연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새벽 네 시에 깨어 반찬을 담는 일은 누군가의 몸과 마음을 매일 먼저 일으켜 세워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뒷모습은 언제나 가게와 이어져 있었다. 망원시장 반찬가게라는 이름은 우리 집의 하루와 분리되지 않았다. 엄마가 부엌에서 반찬을 담는 모습은 곧 가게의 문을 열기 전의 모습이었고, 30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하루씩 쌓여 갔다. 한꺼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엄마의 등 뒤에 있었다.
나는 그 새벽의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한 사람이 오래 버틴다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떠올린다. 거창한 말이나 특별한 순간보다 먼저, 부엌 불빛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이 생각난다. 엄마는 우리보다 먼저 일어나셨고, 우리는 엄마가 먼저 지나간 시간 뒤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 사실을 늦게 알아차렸을 뿐이다.
새벽 네 시라는 시간은 아직 어두운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 시간에 켜진 부엌 불빛은 밖으로 크게 드러나는 빛이 아니라, 집 안 한쪽을 조용히 밝히는 빛이었다. 엄마는 그 빛 아래에서 반찬을 담았다. 나는 그 모습을 전부 본 것 같기도 하고, 일부만 본 것 같기도 하다.
기억 속에서 엄마는 계속 등을 보이고 있다. 돌아서서 무엇을 말하는 장면보다, 말없이 반찬을 담는 장면이 더 선명하다. 그 뒷모습에는 피곤함도 있었을 것이고 익숙함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엄마가 그 시간에 늘 우리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30년이라는 말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만, 그 안에는 수없이 많은 새벽 네 시가 들어 있다. 어느 하루만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비슷한 새벽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엄마는 그 반복을 살아냈고, 나는 그 반복의 한가운데서 자랐다. 부엌 불빛은 그래서 한 장면이면서도 긴 시간처럼 느껴진다.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먼저 부엌이 밝아진다. 아직 하루가 다 오지 않은 시간, 불빛 아래에서 반찬을 담던 등이 조용히 떠오른다. 나는 그 등 뒤에 서 있는 아이처럼 잠시 멈춘다. 새벽 네 시의 부엌 불빛만이 기억 속에서 꺼지지 않고 남아 있다.
7. 하루도 닫지 않은 문
1990년대의 엄마를 떠올리면 먼저 문이 생각난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고, 밤 열 시에 가게 문을 닫던 그 문이다. 아빠가 아프시고 난 뒤에도 엄마는 그 문을 쉽게 닫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는 시간은 늦었고, 다음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다.
나는 그 시절 엄마가 얼마나 피곤했는지 정확히 다 알 수 없다. 다만 나중에 들은 말들로 그 시간을 더듬어 볼 뿐이다. 아빠가 아프시고, 엄마가 혼자 가게를 꾸리던 1990년대가 부모님에게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기였다는 것을 안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 밤 열 시에 문을 닫는 생활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1996년,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때 엄마는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셨다고 나중에 들었다. 병간호와 장사는 서로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은 하나인데 지켜야 할 자리는 둘이었다.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루 쉬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빠가 쓰러진 뒤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 문은 생계와 이어져 있었고 가족의 숨과도 이어져 있었다. 엄마는 고민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빠 병간호를 하면서도 가게 문을 하루도 닫지 않으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루도 닫지 않았다는 말은 너무 단정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피로와 두려움을 오히려 숨기는 것 같았다. 새벽에 시장에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 밤 열 시의 문은 끝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문을 닫고도 다음 새벽을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 시간을 두고 “바다에서 숨 참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은 엄마가 힘들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힘든 일을 힘들다고만 부르지 않고, 지나온 시간과 견주어 견디는 방식이 엄마에게 있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숨을 참던 기억은 엄마 안에 오래 남아, 어려운 날마다 다시 꺼내 쓰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숨을 생각한다. 숨을 참는다는 것은 버티는 일이고, 동시에 반드시 다시 숨을 쉬어야 하는 일이다. 엄마는 아빠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가게를 지켰고, 새벽과 밤 사이를 오갔다. 그 사이에서 엄마가 쉬어 간 자리가 어디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게를 혼자 꾸린다는 말도 지나치게 짧다. 새벽에 시장에 나간다는 말 속에는 일찍 몸을 일으켜야 하는 시간이 들어 있고, 밤 열 시에 문을 닫는다는 말 속에는 그때까지 버틴 하루가 들어 있다. 아빠가 아프신 뒤에는 그 하루 위에 병간호가 더해졌다. 엄마는 그 모든 것을 따로 크게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속의 엄마는 늘 움직이고 있었다. 시장에 나가고, 가게를 열고, 문을 닫고, 아빠를 돌보는 사람이었다. 어떤 날에는 가게를 접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을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 문은 다시 열렸다.
그 시절의 엄마에게 가장 무거웠던 것은 아마 선택이었을 것이다. 가게를 계속할 수도, 접을 수도 없는 자리에서 엄마는 하루를 선택했다. 멀리 내다보며 큰 결심을 했다기보다, 오늘 문을 열고 오늘을 넘기는 쪽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쌓여 문은 닫히지 않았다.
나는 그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엄마의 얼굴을 쉽게 상상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보지 못한 표정까지 만들어 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엄마가 스스로 남긴 말은 분명하다. “바다에서 숨 참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에는 엄마가 살아온 시간의 결이 들어 있다. 바다에서 숨을 참던 사람이었기에, 아빠가 쓰러진 뒤의 날들도 자기 방식으로 견디려 했던 것 같다. 엄마는 힘든 시간을 없던 일처럼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쪽을 택했다.
밤 열 시에 가게 문을 닫는 순간에도 엄마의 하루가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빠 병간호가 있었고, 다음 새벽 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가 하루를 밀어내는 동안 엄마는 가게 문을 계속 열었다. 닫히지 않은 문 너머로 엄마의 시간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8. 미역국과 학사모
엄마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름보다 먼저 자리들이 생각난다. 아빠의 자리, 우리 삼남매의 자리, 그리고 제주에 계신 외할머니의 자리다. 엄마는 그 자리들을 쉽게 비우지 않았다. 해마다 외할머니 생신이 되면 꼭 제주에 내려가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엄마 마음의 한쪽이 늘 그곳에 닿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그 마음을 아주 늦은 밤의 부엌에서 자주 보았다. 고3 때 나는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곤 했다.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이미 가게 일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그냥 재우지 않고, 따뜻한 미역국을 데워주셨다.
그 미역은 늘 제주에서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것이었다. 엄마가 냄비를 다시 불에 올리고, 국이 데워지기를 기다리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피곤한 몸을 내려놓고 앉아 있었다. 말이 많지 않아도, 그 국 안에는 제주에 계신 외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밤늦게 돌아온 내가 함께 있었다.
미역국은 특별한 날의 음식이기도 했지만, 그때의 내게는 하루를 버티게 하는 음식이었다. 엄마는 지친 얼굴로도 국을 데웠고,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밖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온 날이면 마음도 몸도 무거웠다. 그럴 때 엄마는 우리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하시던 말을 해주셨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
그 말은 길지 않았다. 왜 힘든지 캐묻거나, 당장 잘될 것이라고 크게 말하지도 않았다. 다만 지나간다고 했다. 지금의 피곤함도, 마음에 쌓인 불안도,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도 언젠가는 지나간다고 했다. 엄마의 말은 뜨거운 국물처럼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지는 않았지만, 식지 않게 곁에 머물렀다.
엄마에게 가족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매일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아빠와 우리 삼남매, 제주에 계신 외할머니는 엄마의 하루를 붙잡고 있는 이름들이었다. 가게 일이 끝난 뒤에도, 엄마는 누군가의 끼니와 안부를 생각했다. 멀리 있는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미역은 그렇게 우리 집 식탁 위에서 다시 따뜻해졌다.
내가 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썼을 때, 엄마는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고 오셨다. 막내인 내가 학사모를 쓴 그 순간을 엄마는 몹시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날 엄마가 가게 문을 닫았다는 사실은 내게 오래 남아 있다. 하루도 쉽게 비우지 못하던 문을 그날은 나를 보러 닫고 오셨기 때문이다.
졸업식의 사진은 지금도 가게 벽에 걸려 있다. 엄마가 그 사진을 왜 그렇게 오래 걸어두는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아도 조금은 안다. 사진 속에는 학사모를 쓴 내가 있고, 그 앞까지 오기 위해 닫힌 가게 문이 있다. 또 그 전의 밤들, 독서실에서 돌아온 나를 기다리던 미역국이 함께 있다.
가게 벽의 사진은 시간이 지나도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손님들이 오가고, 하루의 일이 이어지는 곳에서 사진은 조용히 걸려 있다. 엄마는 그 사진을 보며 그날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그 벽을 볼 때마다, 따뜻하게 데워지던 미역국과 처음으로 닫혔던 가게 문을 함께 생각한다.
에필로그
엄마의 시간을 돌아보면 늘 물소리와 시장 소리가 함께 들리는 듯하다. 제주 구좌읍 바닷가 마을에서 외할머니를 따라 물질을 배우던 아이는, 스물두 살에 서울로 올라와 너무 시끄러운 도시를 견뎠다. 열 살 무렵 처음 바다에 들어갔다가 무서워 울며 나왔을 때, 외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등을 두드려주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 손길을 오래 품고 살았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중학교까지만 다니셨다. 그래서 우리 공부만큼은 끝까지 시키겠다고 마음먹으셨고, 그 마음은 새벽 네 시 부엌 불빛 아래에서 반찬을 담는 손으로 이어졌다. 망원시장 귀퉁이 두 평짜리 가게에서 자리돔젓과 멸치볶음을 만들던 엄마는 늘 “남의 집 밥상에 올라가는 음식은 내 새끼 먹이는 것처럼 만들어라.”고 하셨다. 그 말은 장사의 말이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아빠가 아프시던 1990년대에도 엄마는 새벽에 시장에 나가 밤 열 시에 문을 닫으셨다. 1996년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을 때 가게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셨다고 들었지만, 병간호를 하면서도 하루도 문을 닫지 않으셨다. 엄마는 “바다에서 숨 참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 뒤에 얼마나 많은 숨이 있었는지 나는 이제 조금 안다.
내가 고3 때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지쳐 있으면서도 제주에서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미역으로 미역국을 데워주셨다. 막내인 내가 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사모를 썼을 때, 엄마는 처음으로 가게 문을 닫고 오셨고 그 사진을 지금도 가게 벽에 걸어두셨다. 엄마는 우리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괜찮다, 다 지나간다.”고 하셨다. 그 말은 지나간 시간을 지우는 말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안고도 다시 숨 쉬게 하는 말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