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 생애 기록
분필 한 자루
마흔 해 교단에서 사람을 믿어온 시간
최명희 · 초등교사 40년 · 샘플 속 인물과 이야기는 예시를 위해 만든 가상의 기록입니다. · PDF로 받기
이 책의 바탕이 된 답변 16개
교실 창가로 들어오던 오후 햇살과 분필 가루. 마흔 해 동안 교단에 섰는데, 눈을 감으면 그 햇살 속 아이들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194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서기셨고, 집에 책이 많았다. 6남매의 맏딸이었다.
1969년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강원도 정선의 분교로 첫 발령을 받은 것.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정선 분교에서 지낸 5년. 전교생이 스물세 명이었고, 나 혼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가르쳤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장작을 하나씩 들고 등교했다.
2009년 남편이 폐암으로 먼저 떠났을 때. 정년퇴임을 한 해 앞두고 있었다. 집이 너무 조용해서 라디오를 하루 종일 켜두었다.
제자들이 찾아와 주었다. 정선 분교 첫 제자였던 박순옥이 매주 반찬을 들고 왔다. 그리고 동네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봉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동네 사람들 반대에도 나를 교대에 보내주셨다. 그리고 남편 김태수. 평생 내 편이었다.
정선 분교 운동장의 큰 은행나무. 폐교된 지금도 그 나무는 남아 있어서 몇 해 전 제자들과 함께 다시 가보았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자라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는 것.
분필 한 자루로 평생 사람을 믿으며 살았다.
겨울밤 아버지가 동생들과 나를 모아놓고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것. 등잔불 아래 아버지 목소리가 참 좋았다.
바로 아래 여동생 명순이. 내가 교대 다닐 때 동생이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보태주었다. 평생 갚지 못한 빚이라고 생각한다.
교대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밤새 어떤 선생님이 될지 이야기했다. 나는 '아이 이름을 다 외우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1973년 강원도 교사 연수에서 남편을 만났다. 같은 조였는데 그 사람이 내 수업 계획서를 보고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라고 말했다.
1985년 교감 승진 제안을 받았을 때. 교실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 남편만 내 결정을 응원해주었다.
일흔이 넘어 돋보기 없이는 아이들 그림책 글씨가 안 보이게 되었을 때. 그래도 지금도 매주 화요일엔 도서관에 간다.
차례
- 등잔불 아래 아버지 목소리
- 명순이가 보태준 학비
- 버스를 세 번 갈아탄 산골
- 스물세 명과 장작 하나씩
-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
- 교실을 떠나지 않기로 한 날
- 라디오가 켜져 있던 집
- 큰 은행나무와 화요일 도서관
프롤로그
삶을 떠올리면 먼저 교실 창가로 들어오던 오후 햇살이 보인다. 그 빛 속에 분필 가루가 떠 있었고, 아이들 얼굴이 있었다. 마흔 해 동안 교단에 섰으나 시간이 지나고도 눈앞에 남는 것은 큰일의 이름보다 그런 장면이다. 나는 그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살아왔다.
나는 194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서기셨고, 집에는 책이 많았다. 겨울밤이면 아버지가 동생들과 나를 모아놓고 『삼국지』를 읽어주셨다. 등잔불 아래 들리던 아버지 목소리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다.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반대에도 나를 교대에 보내주셨다. 바로 아래 여동생 명순이는 내가 교대에 다닐 때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보태주었다. 나는 그 일을 평생 갚지 못한 빚이라고 생각한다. 교대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밤새 어떤 선생님이 될지 이야기하던 때, 나는 아이 이름을 다 외우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1969년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강원도 정선의 분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전교생 스물세 명, 겨울이면 아이들이 장작을 하나씩 들고 등교하던 곳에서 나는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혼자 가르쳤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가 아니라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는 것을 배웠다.
남편 김태수는 평생 내 편이었다. 1973년 강원도 교사 연수에서 만나 내 수업 계획서를 보고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라고 말해주던 사람이다. 그가 2009년 폐암으로 먼저 떠났을 때 집은 너무 조용했고, 나는 라디오를 하루 종일 켜두었다. 그 시간을 지나오게 해준 것은 찾아와 준 제자들과, 도서관에서 다시 만난 아이들이었다.
1. 등잔불 아래 아버지 목소리
나는 1948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내 삶의 처음 자리는 책이 많은 집이었다. 아버지는 면사무소 서기셨고, 집 안에는 책이 늘 있었다. 어린 나에게 그 책들은 아직 다 읽을 수 있는 것이기보다, 집의 한쪽을 조용히 차지하고 있는 세계였다.
나는 6남매의 맏딸이었다. 맏딸이라는 말에는 집안에서 먼저 보고 먼저 배워야 하는 시간이 들어 있었다. 동생들이 곁에 있었고, 나는 그들보다 앞에 서 있는 아이였다. 특별히 무엇을 해냈다기보다, 집안의 공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자랐다.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장면은 겨울밤이다. 아버지가 동생들과 나를 모아놓고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밤이 있었다. 등잔불 아래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목소리가 참 좋았다.
책의 내용보다 먼저 남은 것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겨울밤의 집 안에서 우리는 함께 앉아 있었다. 등잔불은 환하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 모인 시간은 또렷했다. 아버지가 읽어주시는 동안 나는 책이라는 것이 사람을 한자리에 모이게도 한다는 것을 몸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딸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동네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나를 공부의 길로 보내주셨다. 그 마음은 내게 큰 문처럼 열렸다. 내가 스스로 그 길을 다 알기도 전에, 아버지는 먼저 그 길이 내 앞에 있어야 한다고 믿어주셨다.
그 시절에 딸이 공부한다는 말은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무게를 어릴 때 모두 알지는 못했다. 다만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속에 공부가 있었다. 아버지에게 공부는 아들딸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길을 찾아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집에 책이 많았다는 사실은 내 기억에서 아버지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 면사무소 서기였던 아버지, 책을 가까이 두었던 집, 겨울밤에 우리를 불러 앉히던 손길이 한데 이어져 있다. 나는 그 속에서 말을 듣고, 글을 보고, 이야기가 사람 마음에 남는 것을 배웠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집 등잔불 아래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동생들과 함께 앉아 있던 그 밤들을 생각하면, 나는 늘 아버지의 목소리 쪽으로 먼저 돌아간다. 무엇을 크게 설명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읽어주는 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건네셨다. 책장 위의 글자가 아버지의 입을 지나 우리 앞에 놓였다. 나는 그 조용한 시간을 지나며, 세상에는 읽을 것과 배울 것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6남매의 맏딸로 자라는 동안 나는 집 안의 많은 것을 먼저 보았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책을 두고, 어떤 마음으로 딸의 공부를 생각하셨는지 세월이 지나며 더 깊이 알게 되었다. 어린 날에는 그저 아버지 곁에서 듣고 있었을 뿐이다. 등잔불 아래, 『삼국지』를 읽어주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겨울밤 속에 낮게 이어지고 있었다.
2. 명순이가 보태준 학비
아버지는 딸도 공부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이 내 앞에 길처럼 놓였을 때, 동네 사람들의 반대도 함께 있었다. 딸을 교대에 보낸다는 일이 모두에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반대 속에서도 나를 교대에 보내주셨다.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다만 내 공부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누군가의 허락과 결심, 누군가의 버팀이 있어야 내가 교대에 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딸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로 그 버팀을 내게 주셨다.
그 길에는 바로 아래 여동생 명순이도 있었다. 내가 교대에 다닐 때 명순이는 공장에 다니며 내 학비를 보태주었다. 언니가 공부하는 동안 동생이 일해서 보태준 돈이었다. 나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 한쪽이 조용히 무거워진다.
명순이가 내게 무엇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 도움을 받았다. 교대에 다니는 내 시간 속에는 명순이가 공장에 다니던 시간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배운 것은 책 속의 글자만이 아니었다.
평생 갚지 못한 빚이라고 생각한다. 돈으로만 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교대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뜻과 명순이의 보탬이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는다.
교대 기숙사에서는 친구들과 밤새 어떤 선생님이 될지 이야기했다. 잠들기 아까운 밤들이 있었다. 우리는 아직 선생님이 되기 전이었지만, 이미 마음속으로는 교실을 그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으로 아이들 앞에 설 것인가를 서로 묻고 또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아이 이름을 다 외우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그냥 학생으로만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기억하는 선생님이고 싶었다. 이름을 외운다는 것은 아이를 따로 바라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약속처럼 느껴졌다.
밤새 이어진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선생님이 될 수 있을지, 또 되어야 할지 말하고 들었다. 아직 경험은 없었지만 마음은 진지했다. 나는 내가 받은 마음들을 아이들 앞에서 헛되이 쓰지 않고 싶었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반대에도 나를 보내주신 일, 명순이가 공장에 다니며 학비를 보태준 일은 그 밤의 말들 곁에 늘 있었다. 내가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나 혼자 만든 말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믿음과 누군가의 수고 위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쉽게 말할 수 없었고, 더 가볍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기숙사의 밤이 깊어도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조용히 내 마음을 붙들었다. '아이 이름을 다 외우는 선생님'이 되겠다는 말이 내 안에 남았다. 그 밤, 나는 아직 교실에 서기 전이었지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3. 버스를 세 번 갈아탄 산골
1969년, 나는 춘천교대를 졸업했다. 학교를 마쳤다는 사실은 한 시절이 끝났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곧바로 다른 시절이 시작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시작은 강원도 정선의 한 분교였다. 내가 처음 교사로 발령받은 곳이었다.
그곳은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들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한 번에 닿을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 먼저 마음에 남았다. 버스를 갈아탈 때마다 내가 알고 있던 자리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그 길 끝에 내가 맡아야 할 교실이 있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었다.
첫 발령이라는 말에는 설렘도 있었지만, 낯섦이 더 컸다. 교대에서 배운 것들이 이제는 책상 위가 아니라 아이들 앞에서 드러나야 했다. 나는 더 이상 학생으로만 머물 수 없었다. 분필 한 자루를 들고 서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강원도 정선의 분교라는 말은 내게 오래 남았다. 크고 번듯한 곳이 아니라,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야 들어가는 산골의 학교였다. 그곳으로 가는 길 자체가 내게는 교사로 들어서는 문처럼 느껴졌다. 쉽게 닿지 않는 곳에서 내 첫 교직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발령을 삶의 가장 큰 전환점으로 기억한다. 졸업장 하나를 손에 쥐었다고 해서 곧장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첫 발령지는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는 무엇으로 아이들 앞에 설 것인가.
산골 분교로 가는 길은 멀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다시 또 갈아타고, 세 번째 버스를 탔다. 그 사이에 나는 내가 떠나온 곳과 앞으로 닿을 곳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헤아렸다. 길이 길수록 첫 교실은 더 또렷해졌다.
그때의 나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했다. 다만 발령을 받았고, 가야 할 곳이 있었고, 그곳이 강원도 정선의 분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삶은 그렇게 멀리 있는 학교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까지도 그 시작의 일부였다.
세 번의 버스를 거쳐 들어간 산골에서 나는 처음으로 교사라는 이름을 내 삶에 붙였다. 그 이름은 가볍지 않았다. 졸업 뒤 곧바로 주어진 첫 자리였고,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나는 그곳에서 내 삶의 방향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돌아보면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다. 춘천교대를 졸업한 한 사람이 정선의 분교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학생이던 내가 교사가 되어 가는 길이었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던 그 산골의 길목에서, 내 교직의 첫날들이 조용히 문을 열고 있었다.
4. 스물세 명과 장작 하나씩
정선 분교에서 지낸 다섯 해를 떠올리면, 먼저 스물세 명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놓인다. 전교생이 스물세 명이었다. 많다고 할 수도, 적다고 할 수도 없는 그 아이들을 두고 나는 혼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가르쳤다. 교실 안에서 한 학년의 시간이 끝나면 곧 다른 학년의 시간이 이어졌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한 아이를 한 학년으로만 볼 수 없었다. 1학년 아이 옆에 2학년 아이가 있고, 3학년 아이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나는 한 교실 안에서 여러 갈래로 마음을 나누어야 했다. 누구에게는 처음 배우는 것이고, 누구에게는 이미 지나온 것이며, 또 누구에게는 조금 더 멀리 가야 하는 것이었다. 분필 한 자루를 쥐고 서 있으면, 내가 가르치는 것은 글자와 셈만이 아니라 기다림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혼자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가르친다는 일은 하루가 반듯하게 나뉘지 않는 일이었다. 한쪽을 보고 있으면 다른 쪽 아이가 마음에 걸렸고, 한 아이에게 설명을 하고 나면 또 다른 아이의 공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이 모두 같은 속도로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더 분명히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끌고 가기보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한 발씩 내딛게 하고 싶었다.
그 다섯 해가 내게 가장 뜨거웠던 시절로 남은 까닭은 크고 빛나는 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작고 되풀이되는 날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날마다 같은 교실에 들어가고,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분필을 들었다. 스물세 명이라는 작은 학교 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는 사람을 믿는 일이 얼마나 조용하고 꾸준한 일인지 배웠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장작을 하나씩 들고 등교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오래 남아 있다.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장작 하나를 들고 학교로 오는 모습이 있었다. 빈손으로 오는 날과는 다른, 겨울의 아침이었다.
그 장작 하나씩이 교실로 들어오던 시간은 내게 유난히 따뜻하게 남아 있다. 스물세 명의 아이들이 하나씩 들고 온 것이 모이면, 그것은 단순한 장작 더미만은 아니었다. 학교에 오기 위해 자기 몫을 들고 오는 마음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 마음 앞에서 아이들을 더 가볍게 대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자라는 게 아니라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는 것을 나는 그곳에서 배웠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은 말이 아니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함께 지내는 동안, 아이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몸으로 알게 된 것이었다. 재촉한다고 자라는 것도 아니고, 설명을 많이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었다. 믿어주는 마음이 먼저 닿아야 아이들은 자기 속도로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정선 분교의 다섯 해를 생각할 때마다, 수업보다 먼저 아이들의 등교를 떠올린다. 전교생 스물세 명, 그 작은 학교에서 나는 혼자 여러 학년을 맡고 있었다. 겨울 아침이면 아이들이 장작을 하나씩 들고 학교로 들어왔다. 나는 교실에서 그 아이들을 맞으며, 다시 분필을 들었다.
5.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
1973년 강원도 교사 연수에서 나는 김태수를 만났다. 그때 우리는 같은 조였다. 교사로 지내며 연수를 받는 자리였고, 나는 내 수업 계획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이 그 계획서를 보았다는 사실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가 내 수업 계획서를 보고 말했다.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라고. 길지 않은 말이었다. 칭찬이라고 하기에도 조용했고, 인사말이라고 하기에도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 말에서 내 수업을 자세히 보아 준 마음을 느꼈다.
교사는 늘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수업 계획서를 쓸 때도 그 안에는 내가 가르칠 내용만이 아니라,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한 생각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알아본 듯했다.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라는 말은 내게 수업을 잘했다는 말보다 더 깊게 들렸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이 훗날 내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같은 조에서 만난 한 사람이 남편이 되고, 평생 내 편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리라고는 그 자리에서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다만 내 수업 계획서를 들여다보고 아이들을 떠올려 준 사람이라는 첫 기억이 남았다.
살아오며 많은 말들이 지나갔다. 그중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지는 말도 있고,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오래 알려 주는 말도 있다. 김태수가 처음 내게 남긴 말은 후자였다. 그는 나를 앞세워 칭찬하기보다, 내가 마음을 두고 있던 아이들을 먼저 보아 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공부할 길을 얻었다.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동네 사람들 반대에도 나를 교대에 보내주신 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의 삶에서 김태수는 평생 내 편이었다. 내 곁에 선다는 것이 큰소리나 특별한 사건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억은 한 문장으로 남는다. 1973년 강원도 교사 연수, 같은 조, 내 수업 계획서, 그리고 “아이들이 행복하겠네요”라는 말. 그 문장을 떠올리면 한 사람의 시선이 함께 떠오른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조용히 알아본 시선이다.
그날의 연수 자리에서 나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수업 계획서를 보고 아이들을 떠올렸고, 나는 그 말을 오래 품게 되었다. 훗날 그가 내 남편 김태수가 되었을 때에도, 내 안의 첫 장면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같은 조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이 내 계획서를 보고 조용히 건넨 말이 먼저 떠오른다.
6. 교실을 떠나지 않기로 한 날
1985년에 교감 승진 제안을 받았다. 오래 교단에 서 온 사람에게 그것은 흔히 기쁘게 받아들일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은 바로 환해지지 않았다. 그 제안 앞에서 나는 크게 흔들렸다.
교감이 된다는 것은 교실을 떠나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자리는 교실이었다. 아이들 앞에 서는 일, 그 자리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치는 일이 내게는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승진이라는 말에는 무게가 있었다. 누군가는 더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말이 가진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을 들여다볼수록 한 가지가 분명해졌다. 나는 교실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교단에 오래 남고 싶었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묻고 또 물었을 때, 대답은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거절을 결정하는 일은 가볍지 않았다.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고, 거절한다는 말은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내 마음과 다른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승진을 거절했다.
그 결정을 모두가 이해해준 것은 아니었다. 내 곁에서 내 결정을 응원해준 사람은 남편뿐이었다. 그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많은 설명보다,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믿어준 한 사람의 응원이 그때의 나를 버티게 했다.
나는 더 높은 자리보다 교실을 택했다. 그 선택은 누군가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는 내가 해온 일을 계속하겠다는 결정이었다. 교단을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스스로에게 분명히 한 날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그날을 가끔 떠올렸다. 승진 제안 앞에서 흔들리던 마음과, 결국 교실을 택하던 마음이 함께 떠올랐다. 남편만이 내 결정을 응원해주었다는 사실도 함께 남아 있다. 나는 그 응원을 안고 다시 교실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7. 라디오가 켜져 있던 집
2009년, 남편이 폐암으로 먼저 떠났다. 나는 정년퇴임을 한 해 앞두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하루의 시간이 정해진 대로 흘러갔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집 안의 조용함이 먼저 나를 맞았다.
그 조용함이 너무 커서 라디오를 켜두었다. 아침에 켠 라디오는 낮에도, 저녁에도 계속 흘러나왔다. 무슨 말이 나오는지 또렷이 듣고 있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래도 사람의 목소리가 집 안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으로 빈자리가 조금은 덜 크게 느껴졌다.
정년퇴임을 앞둔 마음도 가볍지만은 않았다. 오래 몸담았던 교실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집에는 함께 지내던 사람이 없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불을 켜면, 그 불빛 아래 놓인 것들이 전과 같으면서도 전과 같지 않았다. 라디오 소리만이 그 사이를 메우듯 계속 흘렀다.
그때 제자들이 찾아와 주었다. 누가 시켜서 온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하나둘 집으로 와 주었다. 나는 그 얼굴들을 보며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고마움을 느꼈다. 교실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 내 슬픔의 문턱까지 찾아와 준 것이다.
정선 분교 첫 제자였던 박순옥은 매주 반찬을 들고 왔다. 처음 제자로 만났던 아이가 어느새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손에 들린 반찬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은, 잊지 않고 찾아오는 그 발걸음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받을 때마다 허전한 집 안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반찬을 받아 놓고 나면 부엌의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혼자 먹는 밥상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뚜껑을 열고 닫는 작은 움직임에도 마음이 따라 움직였다. 밥을 먹는 일이 단순히 끼니를 잇는 일이 아니라, 찾아와 준 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되었다.
라디오는 여전히 하루 종일 켜져 있었다.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나는 집 안을 천천히 오갔다. 어느 날은 그 소리를 배경처럼 두고 앉아 있었고, 어느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들었다. 소리가 있다고 해서 슬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전히 혼자인 듯한 느낌은 조금 덜했다.
제자들이 왔다가 돌아간 뒤에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처음의 조용함과 같지 않았다. 누군가 다녀간 자리, 들고 온 반찬, 잠시 머물다 간 발걸음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라디오가 켜진 방에 앉아 그 남은 기척들을 오래 느꼈다.
8. 큰 은행나무와 화요일 도서관
정선 분교 운동장에는 큰 은행나무가 남아 있다. 학교는 폐교되었지만, 그 나무는 그대로 있다고 해서 몇 해 전 제자들과 함께 다시 가보았다. 한때 아이들이 오가던 운동장에 서니, 내가 오래전에 서 있던 자리와 아이들이 뛰던 자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무엇을 더 보태 말하지 않아도, 제자들과 함께 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마흔 해 동안 교단에 섰다. 눈을 감으면 교실 창가로 들어오던 오후 햇살과 분필 가루가 먼저 떠오른다. 햇살 속에 아이들 얼굴이 있었고, 칠판 앞에는 늘 내 손에 들린 분필이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그 장면은 흐려지지 않고, 어떤 날은 지금 막 수업을 마친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폐교된 운동장에서 은행나무를 바라보며, 나는 그동안 지나온 교실들을 생각했다. 학교라는 이름은 사라져도 그 안에 있던 아이들의 얼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선 분교 첫 제자였던 박순옥이 나를 찾아와 주던 일도 함께 떠올랐다. 매주 반찬을 들고 오던 그 발걸음은, 교실 밖에서도 이어진 제자의 마음이었다.
일흔이 넘고 나서는 몸이 먼저 세월을 알려 주었다. 어느 날부터 돋보기 없이는 아이들 그림책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칠판의 글씨도, 공책의 글씨도 눈으로 바로 따라갔는데 이제는 책장을 펼치기 전에 돋보기를 먼저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낯설었지만, 글씨가 흐려진다고 해서 책 읽어 주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이면 동네 도서관에 간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봉사를 하러 가는 길이다. 그림책을 펼치고 돋보기를 맞추면, 작은 글씨들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 앞에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전 교실 창가의 오후 햇살이 조용히 곁에 앉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은 교단에 서던 때와 다르면서도 닮아 있다. 칠판 앞에 서서 분필을 쥐던 손은 이제 그림책을 잡고 있다. 분필 가루가 날리던 교실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내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은 오래전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읽고, 아이들이 듣고 있는 시간을 따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긴다.
정선 분교의 큰 은행나무와 화요일 도서관은 멀리 떨어진 장소처럼 보이지만, 내게는 같은 길 위에 있다. 하나는 폐교된 운동장에 남아 있고, 하나는 지금도 내가 걸어가는 곳이다. 그 사이에 마흔 해 교단의 날들이 있고, 창가의 오후 햇살과 분필 가루가 있다. 나는 화요일마다 돋보기를 챙겨 도서관으로 가고, 책을 펼친 자리에서 다시 아이들 얼굴을 만난다.
에필로그
눈을 감으면 아직도 교실 창가로 오후 햇살이 들어온다. 그 빛 속에 분필 가루가 떠 있고, 아이들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마흔 해 동안 교단에 서며 나는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더 많이 배웠다. 아이들은 가르치는 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는 만큼 자란다는 것을, 나는 그 아이들 곁에서 알게 되었다.
내 삶의 처음에는 전북 남원의 집과 아버지의 목소리가 있다. 겨울밤 등잔불 아래에서 아버지는 동생들과 나를 모아놓고 『삼국지』를 읽어주셨다. 딸도 공부해야 한다며 동네 사람들 반대에도 나를 교대에 보내주신 분도 아버지였다. 바로 아래 여동생 명순이는 공장에 다니며 내 학비를 보태주었다. 그 마음들은 평생 다 갚지 못한 빚으로 남아 있다.
정선 분교로 처음 들어가던 길은 버스를 세 번 갈아타야 했다. 전교생 스물세 명, 혼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맡았던 그 5년은 내게 가장 뜨거운 시절이었다. 겨울이면 아이들이 장작을 하나씩 들고 등교했다. 그 장작들이 교실을 덥혔고, 나는 그 온기를 오래 품고 살았다.
남편 김태수는 평생 내 편이었다. 교감 승진을 거절하고 교실에 남겠다고 했을 때도 그는 내 결정을 응원해주었다. 2009년 남편이 먼저 떠난 뒤 집이 너무 조용해 라디오를 하루 종일 켜두었지만, 제자들이 찾아와 주었다. 박순옥은 매주 반찬을 들고 왔고, 나는 동네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일흔이 넘어 돋보기 없이는 그림책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매주 화요일이면 도서관에 간다. 몇 해 전 제자들과 폐교된 정선 분교에 다시 갔을 때, 운동장에는 큰 은행나무가 남아 있었다. 분필 한 자루로 평생 사람을 믿으며 살았고, 지금도 나는 책장을 넘기는 아이들 곁에서 조용히 그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