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 · 자서전
마루가 덜덜 떨리던 시간
안동 외곽 기찻길에서 정년 퇴임까지
박정호 · 철도 기관사로 35년 · 샘플 속 인물과 이야기는 예시를 위해 만든 가상의 기록입니다. · PDF로 받기
이 책의 바탕이 된 답변 16개
경북 안동 외곽 마을의 기찻길. 집 뒤로 중앙선 철로가 지나갔는데,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루가 덜덜 떨렸다. 나는 그 진동이 좋아서 기차 시간만 되면 철둑에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정미소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밭일과 삯바느질을 하셨다. 4남매 중 셋째였다. 쌀은 늘 빠듯했지만 정미소 덕에 겨울에 굶은 적은 없었다.
할머니.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니셨다.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지만 옛날이야기를 끝도 없이 아셨다.
안동역 대합실. 중학생 때 방과 후면 역에 가서 기관사 아저씨들이 기관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가 섞인 그 공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말이 없고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고장 난 라디오를 뜯어서 고치곤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고치는 정호'로 불렸다.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된다는 것. 형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다녔고, 나도 그래야 하나 고민했다. 결국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철도고 2학년 때 실습으로 처음 서울 용산역에 갔을 때. 플랫폼에 기차가 수십 대 서 있는 걸 보고 세상이 이렇게 크구나 싶었다.
1978년, 스무 살에 처음 보조기관사로 발령받아 제복을 입던 날. 어머니가 제복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주시며 우셨다.
언젠가 내 손으로 새마을호를 모는 것. 그 시절 새마을호는 기관사들 사이에서 꿈의 열차였다.
선배들의 군기와 밤샘 근무. 첫 해에는 3일에 한 번씩 밤을 새웠고, 실수 하나에도 크게 혼났다. 그래도 그 덕에 단 한 번도 큰 사고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김상철 선배 기관사. '기관사는 승객 천 명의 목숨을 등에 지고 달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늘 하셨다. 그 말이 35년 동안 나를 붙잡아 주었다.
1984년 같은 역에서 매표 일을 하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들 둘이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부터 근무표를 받으면 아이들 생일부터 확인했다.
1990년대 중반, 큰아들이 아파서 병원비가 많이 들던 때. 남들이 꺼리는 야간 화물열차 근무를 자청해서 2년 넘게 했다.
1998년 드디어 새마을호 기관사가 되었을 때. 첫 운행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내내 손에 땀이 났다. 종착역에 도착해서 혼자 기관실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2008년 무릎 수술을 받고 6개월 동안 운전대를 놓았던 때. 다시 기관차에 오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아내가 매일 병원에 와서 재활을 함께 해주었다.
아내와 함께 매일 아침 동네 둑길을 걸었다. 걷다 보면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2013년 정년 퇴임 때까지 무사히 일을 마쳤다.
차례
- 철둑에 올라 손을 흔들던 아이
- 정미소와 밭일,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 안동역 대합실의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
- 대학 대신 철도고등학교로
- 어머니가 채워주신 제복 단추
- 밤샘 근무와 승객 천 명의 목숨
- 근무표에서 아이들 생일을 먼저 보던 시절
- 새마을호, 무릎 수술, 다시 들린 기차 소리
프롤로그
내 어린 시절의 첫 장면은 경북 안동 외곽 마을의 집 뒤로 지나가던 중앙선 철로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루가 덜덜 떨렸고, 나는 그 진동이 좋았다. 기차 시간만 되면 철둑에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그때의 나는 그 철길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알지 못했지만, 몸으로 먼저 기차를 배웠다.
아버지는 정미소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밭일과 삯바느질을 하셨다. 쌀은 늘 빠듯했지만 겨울에 굶은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니셨고, 글을 모르시던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끝도 없이 들려주셨다. 내게 세상은 기차 소리와 마루의 떨림, 할머니 등에 기대어 듣던 이야기로 먼저 열렸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역을 떠나지 못했다. 방과 후 안동역 대합실에 가서 기관사 아저씨들이 기관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가 섞인 공기는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고장 난 라디오를 뜯어 고치던 손은 늘 무언가를 만지고 싶어 했다.
대학에 갈 형편은 되지 않았고, 형이 먼저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다녔다. 나도 그런 길을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로 내 삶은 기차와 더 가까워졌다. 스무 살에 보조기관사로 발령받아 제복을 입던 날, 어머니가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주시며 우셨다. 그 눈물 앞에서 나는 어른이 된다는 일이 기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1. 철둑에 올라 손을 흔들던 아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경북 안동 외곽 마을의 기찻길이 생각난다. 집 뒤로 중앙선 철로가 지나갔다. 그 철로는 내게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 안의 마루까지 흔들어 놓는 가까운 존재였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루가 덜덜 떨렸다.
나는 그 진동을 좋아했다. 마루가 떨리기 시작하면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듯했다. 집 뒤로 기차가 지나간다는 사실이 발끝과 손끝으로 전해졌다. 어린 나는 그 떨림을 무서워하기보다 기다렸다.
기차 시간이 되면 나는 철둑에 올라갔다. 기차가 오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철둑 위에 서서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손을 흔들었다. 누가 내 손짓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매번 그렇게 했다.
그때의 나는 기차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깊이 알지 못했다. 다만 집 뒤를 지나가는 긴 움직임이 좋았다. 마루를 떨리게 하고, 나를 철둑 위로 불러내는 그 시간이 좋았다.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떨림은 잦아들었지만,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어린 시절의 많은 일들은 흐릿해졌어도, 그 장면만은 또렷하다. 경북 안동 외곽 마을, 집 뒤의 중앙선 철로, 덜덜 떨리던 마루, 그리고 기차 시간만 되면 철둑에 올라가 손을 흔들던 아이가 있었다. 기차가 지나간 뒤에도 철둑 위에는 내가 흔든 손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2. 정미소와 밭일,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아버지는 정미소에서 일하셨다. 어린 시절의 우리 집 살림을 떠올리면, 그 말이 먼저 앞에 선다. 집에 쌀이 넉넉히 쌓여 있던 것은 아니었다. 쌀은 늘 빠듯했고, 그 빠듯함은 아이였던 나에게도 아주 멀리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밭일을 하셨고 삯바느질도 하셨다. 밭일을 다녀오고, 남의 바느질을 받아 하는 어머니의 하루를 나는 가까이에서 보며 자랐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자의 일터로 나가야 집안이 굴러갔다. 그 시절의 살림은 그렇게 조금씩 이어졌다.
나는 4남매 중 셋째였다. 집 안에 아이가 넷이라는 것은 늘 무엇인가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먹을 것도, 부모님의 손길도, 집안의 작은 자리도 서로 나누며 지냈다. 그래도 겨울에 굶은 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정미소에서 일하신 덕이었다. 쌀이 늘 빠듯했지만, 겨울을 넘길 만큼은 있었다. 넉넉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굶주림으로 겨울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아이였던 나는 그 사실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나중에야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나는 할머니와 함께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다니셨다. 내가 스스로 걸어 다니기 전의 일들도 있고, 걸을 수 있게 된 뒤에도 할머니의 등에 기대던 시간이 있었다. 부모님이 집을 비운 자리에는 할머니의 등이 있었다.
할머니는 글을 모르셨다. 그러나 옛날이야기는 끝도 없이 아셨다. 책을 읽어 주신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책보다 오래된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 곁에서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졌고, 어느 이야기가 먼저였는지 뒤였는지 가끔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글을 모르신다는 말과 이야기를 끝도 없이 아신다는 말은 내 기억 속에서 나란히 남아 있다. 배운 글자는 없었지만, 할머니 안에는 많은 시간이 들어 있었다.
부모님은 바깥에서 일했고, 할머니는 집 안팎에서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정미소 일, 어머니의 밭일과 삯바느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따로 떨어진 기억이 아니다. 그것들이 모두 어린 나의 하루를 이루고 있었다.
쌀이 빠듯하다는 말은 집안의 형편을 짧게 설명해 주지만, 그 안에는 여러 사람의 손이 있었다. 아버지는 정미소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밭일과 바느질을 하셨고, 할머니는 나를 업고 다니셨다. 나는 4남매 중 셋째로 그 손들 사이에서 지냈다. 넉넉하지 않은 집에서도 겨울을 넘겼고, 아이 하나는 할머니의 등에 기대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먼저 대단한 사건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다. 일하러 나가던 부모님, 나를 업고 다니던 할머니, 끝없이 이어지던 옛날이야기가 떠오른다. 글을 모르시던 할머니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은 어린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그 등에 기대어, 다음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안동역 대합실의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
중학생 때 방과 후면 나는 안동역 대합실로 갔다. 특별한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가면 기관사 아저씨들이 기관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곤 했다.
안동역 대합실에는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어느 한쪽만 또렷한 냄새가 아니라, 두 냄새가 함께 묻어 있는 공기였다. 그 공기는 오래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안동역을 떠올리면 먼저 그 냄새가 되살아난다.
기관차에서 내리는 기관사 아저씨들의 모습은 내게 낯설면서도 가까웠다. 나는 그들이 어떻게 기관차를 움직이고, 어디에서 내려와 대합실 쪽으로 걸어오는지 지켜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잘 묻지 않았다. 원래 말이 많은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틈에서 조용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앞에 나서서 떠드는 쪽은 아니었다. 대신 손으로 무엇인가 만지는 일에는 오래 집중할 수 있었다. 고장 난 물건을 그냥 두고 보는 것보다,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뜯어보는 일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때 내가 자주 만진 것은 고장 난 라디오였다. 라디오가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뜯어 보곤 했다. 속을 들여다보고, 다시 맞추고, 어떻게든 소리가 나게 해보려 했다. 그렇게 고친 라디오가 있을 때마다 손끝에 남는 느낌이 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고치는 정호’라고 불렀다. 그 별명에는 내가 말이 적은 아이였다는 것과, 손으로 하는 일에 익숙했다는 것이 함께 담겨 있었다. 나는 그 말을 크게 자랑하지도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냥 친구들이 나를 그렇게 알아준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안동역 대합실에서 보던 기관차와, 집에서 뜯어보던 라디오는 서로 다른 물건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둘 다 안쪽이 궁금한 것들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그 안에서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가 마음에 남았다. 나는 말로 묻기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확인하는 아이였다.
방과 후 안동역으로 가던 길의 마음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대합실에 들어서면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가 먼저 나를 맞았다. 기관사 아저씨들이 기관차에서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면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오래 바라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내 곁으로, 그 냄새 섞인 공기가 천천히 지나갔다.
4. 대학 대신 철도고등학교로
청소년기에 내 마음을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고민은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이라는 말은 가까이 있는 길 같으면서도, 막상 발을 내딛으려 하면 내 앞에서는 멀어지는 길처럼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마음과 갈 수 없는 형편이 서로 맞지 않을 때, 사람은 쉽게 말을 잃는다. 나는 그 시절 자주 그런 마음으로 지냈다.
형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다녔다. 그 사실은 내게 하나의 길처럼 보이기도 했고, 동시에 내가 따라가야 할 현실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나도 서울로 올라가 공장에 다녀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생각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어느 쪽으로 마음을 정해야 할지 오래 맴돌았다.
집안 형편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은 더 조용하고 무거웠다. 누가 크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어렸지만, 형편이라는 말이 사람의 앞날을 얼마나 일찍 눌러 오는지 알고 있었다.
형이 먼저 서울로 간 일은 내게 자주 떠오르는 기준이었다. 형이 그렇게 했으니 나도 그래야 하는지 생각했다. 서울과 공장이라는 말은 내 앞에 놓인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마음 한쪽에는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결국 나는 철도고등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학에 가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형편 안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길을 고른 것이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고민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발을 놓을 자리가 조금 생긴 듯했다.
철도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내가 얼마나 먼 곳으로 가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때까지 내가 알던 세상은 그리 넓지 않았다. 내 앞에 놓인 길이 철도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길이 실제로 어떤 풍경으로 펼쳐질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던 철도와, 몸으로 마주하게 될 철도는 다를 것이었다.
철도고 2학년 때 실습으로 처음 서울 용산역에 갔다. 처음이라는 말이 붙는 일들은 오래 남는다. 나는 그곳에서 플랫폼에 기차가 수십 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한두 대가 아니라 수십 대의 기차가 한곳에 서 있는 풍경은, 내가 알고 있던 크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세상이 이렇게 크구나 싶었다.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된다는 고민 속에서 고른 길이었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넓은 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형이 먼저 올라간 서울을 나는 철도고등학교 실습으로 처음 마주했다. 그 서울의 용산역에서, 나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조용히 느꼈다.
플랫폼에 서 있던 기차들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앞에서 오래 바라보았다. 수십 대의 기차가 한곳에 모여 있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말로 다 설명하지 않아도, 그 풍경은 내게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의 용산역은 내 기억 속에 크게 남아 있다. 대학 대신 택한 길이었고, 고민 끝에 들어선 길이었다. 나는 플랫폼 위에서 수십 대의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눈앞에 늘어선 기차들 사이로,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이 조용히 열려 있었다.
5. 어머니가 채워주신 제복 단추
1978년, 나는 스무 살이었다. 처음 보조기관사로 발령을 받았고, 그날 제복을 입었다. 몸에 제복을 걸치는 일은 단순히 옷을 갈아입는 일이 아니었다. 그 옷을 입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뒤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이 아니라 철도 안으로 들어가 일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 서서 제복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주셨다. 손으로 단추를 잡고, 구멍에 맞추어 끼우는 그 작은 동작이 오래 이어졌다. 나는 가만히 서 있었고, 어머니는 말없이 단추를 채우시다가 우셨다. 그 눈물을 보며 나는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스무 살의 나는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보조기관사라는 이름이 내게 주어졌지만, 그 이름이 품고 있는 무게를 다 알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래도 제복은 나를 다르게 서 있게 했다. 어머니의 손이 닿은 단추들이 가슴 앞에 차례로 잠기면서, 나는 내가 돌아설 수 없는 길 위에 섰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가 왜 우셨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다 헤아리지 못했다. 기쁨이었는지, 걱정이었는지, 그 둘이 섞인 마음이었는지 말로 가를 수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내 제복을 당신 손으로 여며주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다. 그 장면은 세월이 지나도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 시절 내 마음속에는 새마을호가 있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새마을호를 몰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새마을호는 기관사들 사이에서 꿈의 열차였다. 나 역시 그 꿈을 바라보며 보조기관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꿈이라는 말은 그때 내게 멀고도 분명한 것이었다. 당장 내 앞에 있는 것은 제복이었고, 발령이었고, 보조기관사라는 자리였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이미 새마을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 내 손으로 몰 수 없는 열차였지만, 언젠가는 그 자리에 서고 싶었다.
나는 그날 어머니 앞에서 제복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어머니의 손끝이 단추 하나하나를 지나갔고, 나는 그 손길을 받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울고 계신 어머니를 보며 나도 마음이 가라앉았다. 스무 살의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어른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처음 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은 내 이름 옆에 새로운 책임이 붙었다는 뜻이었다. 보조기관사라는 말은 아직 앞에 ‘보조’가 붙어 있었지만, 그 안에도 기관사로 가는 길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길 끝 어딘가에 새마을호가 있다고 믿었다. 기관사들 사이에서 꿈의 열차라 불리던 그 이름은 내게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목표였다.
어머니가 채워주신 단추는 그날 하루의 옷매무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여며진 제복을 입고 처음으로 철도원의 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어머니의 눈물과 새마을호에 대한 꿈이 같은 날 내 안에 들어왔다. 한쪽에는 나를 보내는 마음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있었다.
그날을 떠올리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큰 말이나 거창한 다짐이 아니다. 어머니가 내 앞에서 단추를 하나씩 채우던 모습이다. 나는 스무 살이었고, 처음 보조기관사로 발령받아 제복을 입고 있었다. 마지막 단추가 잠긴 뒤에도 어머니의 눈물은 내 가슴 앞에 오래 남아 있었다.
6. 밤샘 근무와 승객 천 명의 목숨
사회에 나와 내가 가장 먼저 부딪힌 것은 선배들의 군기와 밤샘 근무였다. 학교를 나와 일터에 섰다고 해서 곧바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몸은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직 낯선 규칙 앞에서 자주 굳어졌다. 선배들의 눈빛 하나, 지적 한마디가 무겁게 느껴지던 때였다.
첫해에는 사흘에 한 번씩 밤을 새웠다. 하루가 끝났다고 해서 내 시간이 오는 것이 아니었고, 밤이 깊어졌다고 해서 일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잠을 건너뛴 몸으로 다시 근무에 들어가면 작은 일도 크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리를 지켜야 했고,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야 했다.
실수 하나에도 크게 혼났다. 지금 생각하면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일도 그때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선배들은 왜 그렇게 엄하게 구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혼나고 나서야, 이 일이 대충 익숙해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의 군기는 마음을 다치게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붙들어 세우기도 했다. 밤을 새우고, 지적을 받고, 다시 확인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피곤하다는 말로 넘길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한 번의 방심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몸으로 배워야 했다.
김상철 선배 기관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선배는 늘 “기관사는 승객 천 명의 목숨을 등에 지고 달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은 처음 들었을 때도 무겁게 다가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깊게 남았다. 기관사라는 일이 단순히 기계를 움직이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말이 분명하게 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오래 품고 일했다. 근무가 힘들 때도, 잠이 모자랄 때도, 실수 하나가 두려워질 때도 그 말이 앞에 있었다. 승객 천 명이라는 숫자는 막연한 숫자가 아니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의 무게를 잊지 않게 하는 말이었다.
35년 동안 나는 그 말에 붙잡혀 있었다. 누가 보지 않는 순간에도, 익숙함이 손끝을 무디게 만들려 할 때에도 그 말은 나를 다시 긴장하게 했다. 그래서 나는 단 한 번도 큰 사고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운만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첫해의 밤샘 근무는 오래 지나도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사흘에 한 번씩 밤을 새우던 시간, 실수 하나에 크게 혼나던 순간들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때는 힘들기만 했던 일들이, 나중에는 내가 흔들리지 않게 해준 버팀목이 되었다. 밤을 지난 근무 자리에서 나는 조용히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
7. 근무표에서 아이들 생일을 먼저 보던 시절
1984년에 나는 같은 역에서 매표 일을 하던 아내를 만났다. 우리는 같은 역 안에서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고, 그곳에서 만나 결혼했다. 철도에서 일하는 사람끼리 산다는 것은 서로의 시간을 조금은 알고 시작하는 일이었다. 정해진 때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있다는 것도, 근무표 한 장에 하루의 모양이 달라진다는 것도 아내는 알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도 한동안 나는 근무를 중심에 두고 살았다. 역과 열차의 시간은 늘 먼저였고, 나는 그 시간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아들 둘이 태어나고 나서 마음의 순서가 달라졌다. 처음으로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은 거창하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근무표를 받으면 예전처럼 내 차례와 시간만 보지 않았다. 아이들 생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날 내가 집에 있을 수 있는지, 아이들 곁에 있을 수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게 되었다.
철도 일을 하면서 근무표는 늘 중요한 종이였다. 누구에게나 그랬겠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된 뒤 더 다른 뜻을 갖게 되었다. 근무표 위의 날짜들은 단순한 날짜가 아니었다. 그 안에 아이들 생일이 있었고, 내가 빠질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다.
아들 둘이 태어난 뒤에는 집이라는 말도 다르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근무를 마치면 돌아가는 곳이었다면, 그때부터는 서둘러 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일이 끝난 뒤의 마음이 먼저 집으로 가 있었다. 몸은 역에 남아 있어도, 근무표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은 아이들 날짜를 짚고 있었다.
가족이 생긴다는 것은 책임이라는 말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그 말보다 먼저, 일찍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것을 알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다짐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긴 변화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큰아들이 아팠다. 병원비가 많이 들던 때였다. 그 시절 나는 남들이 꺼리는 야간 화물열차 근무를 자청했다. 그렇게 2년 넘게 했다.
야간 화물열차 근무는 모두가 선뜻 맡고 싶어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내게는 큰아들의 병원비가 먼저였다. 힘든 근무인지 아닌지를 따지기보다,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가족을 위해 애썼던 시기를 묻는다면 나는 그때를 떠올린다. 큰아들이 아팠고, 병원비가 필요했고, 나는 야간 화물열차 근무를 했다. 긴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그 시절은 내 안에 분명하게 남아 있다.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 시간이었다.
2년이 넘는 동안, 나는 그 근무를 계속 자청했다.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었던 마음과, 집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은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자리에서 나왔다. 아이들 곁에 있고 싶었고, 아이들을 위해 벌어야 했다.
근무표에서 아이들 생일을 먼저 보던 시절과, 야간 화물열차 근무를 자청하던 시절은 내게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는 집에 있고 싶은 마음이었고, 하나는 집을 위해 밖에 있어야 하는 마음이었다. 둘 다 가족이 생긴 뒤에 내 삶에 들어온 마음이었다. 나는 그 마음들을 안고 역과 집 사이를 오갔다.
그때의 근무표를 떠올리면, 먼저 날짜를 훑던 내 눈길이 생각난다. 아이들 생일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내가 그날 어떤 근무를 하게 되는지 보았다. 큰아들이 아프던 때에는 또 다른 계산이 그 위에 겹쳤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과 일을 더 해야 하는 마음이 같은 종이 위에 놓여 있었다.
8. 새마을호, 무릎 수술, 다시 들린 기차 소리
1998년, 나는 드디어 새마을호 기관사가 되었다. 그 말을 마음속으로 여러 번 되뇌어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첫 운행 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동안 손에 땀이 났다. 운전대를 잡은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은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날의 길은 낯선 길이 아니었다. 그래도 새마을호 기관사로 앉아 있는 자리는 달랐다. 몸은 오래 해온 일을 따라 움직였지만, 마음은 작은 소리에도 더 크게 반응했다.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내내 나는 내 손끝과 앞길 사이에 온 신경을 모았다.
기관실 안에서는 시간이 길게 늘어지는 듯했다. 지나온 세월이 한꺼번에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겁고도 또렷했다. 손에 밴 땀을 느낄 때마다,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부산에 닿았을 때 비로소 숨이 조금 내려앉았다. 종착역에 도착하고도 나는 곧장 일어나지 못했다. 혼자 기관실에 한참 앉아 있었다. 더 움직일 일도 없는데, 그 자리를 쉽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기관실에는 막 지나온 길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첫 운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와, 이제 정말 이 일을 맡게 되었다는 실감이 조용히 밀려왔다. 손에 남은 땀의 감각이 그날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 뒤로도 나는 운전대를 잡고 일을 이어갔다. 그러다 2008년에 무릎 수술을 받았다. 수술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여섯 달 동안 운전대를 놓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다시 기관차에 오르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몸이 쉬는 동안 마음은 쉬지 못했다. 내가 다시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지, 예전처럼 해낼 수 있을지 자꾸 생각이 따라왔다. 운전대를 잡지 못하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내 안의 불안도 길어졌다. 그때 아내가 매일 병원에 와서 재활을 함께 해주었다.
아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은 말보다 먼저 힘이 되었다. 재활은 하루아침에 나아지는 일이 아니었다. 몸은 더디게 따라왔고, 마음은 앞서가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아내와 함께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아내와 함께 매일 아침 동네 둑길을 걸었다.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무릎을 의식하며 한 발씩 내딛는 동안, 아침 공기 속에서 내 몸의 상태를 살폈다. 아내와 나란히 걷는 그 길이 내게는 다시 돌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둑길을 걷다 보면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 귀에는 분명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었다. 무릎의 통증보다 그 소리가 더 또렷하게 남는 아침들이 있었다.
기차 소리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걷는 동안 나는 서두르지 않으려 했다. 다시 기관차에 오르려면 마음만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나 다시 일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3년 정년 퇴임 때까지 무사히 일을 마쳤다. 무사히라는 말은 짧지만, 그 안에는 많은 날의 긴장과 조심스러움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말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었다.
새마을호 첫 운행 날 종착역의 기관실에 혼자 앉아 있던 시간이 가끔 떠오른다. 그리고 무릎 수술 뒤 둑길에서 멀리 들리던 기차 소리도 함께 떠오른다. 한때는 손에 땀이 나도록 붙잡았고, 한때는 다시 잡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던 운전대였다. 아침 둑길에서 들리던 그 소리는 오래도록 내 걸음 옆에 남아 있었다.
에필로그
돌아보면 내 삶은 늘 기차 소리 곁에 있었다. 경북 안동 외곽 마을의 집 뒤로 중앙선 철로가 지나갔고, 기차가 지날 때마다 마루가 덜덜 떨렸다. 나는 그 떨림이 좋아 철둑에 올라가 손을 흔들었다. 그때는 내가 평생 그 진동을 따라 살게 될 줄 몰랐다.
아버지는 정미소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밭일과 삯바느질을 하셨다. 쌀은 빠듯했지만 겨울에 굶은 적은 없었고,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할머니가 나를 업고 다니셨다. 글을 모르시던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끝도 없이 들려주셨다. 안동역 대합실의 기름 냄새와 석탄 냄새도, 고장 난 라디오를 뜯어 고치던 손끝도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대학에 갈 형편이 안 되어 철도고등학교로 갔고, 스무 살에 보조기관사 제복을 입었다. 어머니가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주시며 우시던 날을 잊지 못한다. 선배들의 군기와 밤샘 근무 속에서 많이 혼났지만, 김상철 선배 기관사의 말처럼 나는 승객 천 명의 목숨을 등에 지고 달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놓지 않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둘이 태어난 뒤에는 근무표에서 아이들 생일을 먼저 보았다. 큰아들이 아팠을 때는 야간 화물열차 근무를 자청했고, 1998년에는 오래 꿈꾸던 새마을호를 몰았다. 무릎 수술 뒤 운전대를 놓았던 6개월은 두려웠지만, 아내와 아침마다 둑길을 걸으며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를 들었다. 2013년 정년 퇴임까지 무사히 일을 마친 지금, 나는 여전히 그 소리를 들으면 걸음을 멈춘다.